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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영화보고 쓰기

행복한 사전 후기 -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의 15년

by 키네마샵 2026. 5. 18.

요즘 영화관에 가면 다 화려한 액션이나 빠른 전개의 스릴러뿐이잖아요. 가끔은 그게 좀 피곤할 때가 있어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영화, 그냥 사람들이 자기 일을 묵묵히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영화가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런 영화 한 편 추천드릴게요. 2013년 일본 영화 《행복한 사전(舟を編む)》입니다. 한국 누적 관객 1만 명을 넘겼는지도 모를 정도로 묻혀있는 작품인데, 일본에서는 그 해 일본 아카데미상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까지 휩쓴 명작이에요.

 

원제 '후네오 아무(舟を編む)'는 '배를 엮다'라는 뜻이에요. 사전을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에 비유한 거죠. 한국 제목보다 원제가 훨씬 멋있습니다.

어떤 영화냐면

1995년, 도쿄의 한 출판사. 사전편집부라는 부서에 베테랑 편집자가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어요. 후임을 찾아야 하는데, 사전 만드는 일이 워낙 인기가 없어서 아무도 안 가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영업부에서 일하지만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늘 혼자인 한 청년이 발견돼요. 이름이 '마지메'(마츠다 류헤이). 일본어로 '진지하다, 성실하다'는 뜻이에요. 이름 그대로 정말 우직하고 답답할 정도로 진지한 사람입니다. 사람들과 대화도 잘 못하고, 책만 읽는 그런 청년.

 

이 마지메가 사전편집부에 합류하면서 '대도해(大渡海)'라는 새로운 사전을 만드는 15년짜리 프로젝트가 시작돼요. 그러면서 마지메는 단어들을 수집하고, 동료들과 일하는 법을 배우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알아가요. 그리고 하숙집 할머니의 손녀 카구야(미야자키 아오이)에게 한눈에 반하면서 사랑하는 법까지 배우게 됩니다.

 

설명만 들으면 너무 잔잔하죠? 맞아요. 정말 잔잔합니다. 그런데 그게 이 영화의 매력이에요.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단어'

이 영화는 단어 하나하나의 무게를 다루는 영화예요.

 

영화 중반에 마지메가 '사랑(恋)'이라는 단어를 사전에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고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동료들이 모여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토론해요. 이게 뭐 별 일이냐 싶지만, 보다 보면 진짜 빠져듭니다. 한 단어를 정확히 정의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깨닫게 돼요.

 

우리가 평소에 너무 쉽게 쓰는 말들 — '사랑', '친구', '오른쪽'(이 단어 정의 어떻게 하실 거예요? 한번 해보세요. 진짜 어렵습니다) — 이런 단어들을 정의하기 위해 누군가는 평생을 바친다는 사실. 그 사람들이 만든 사전을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쓰고 있다는 사실. 이 영화 보고 나면 책상 위 사전이 좀 다르게 보입니다.

마츠다 류헤이의 인생 연기

이 영화에서 마츠다 류헤이가 진짜 미쳤어요. 일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이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마지메라는 캐릭터가 굉장히 어려워요. 사회성 떨어지고, 어딘가 어색하고, 말도 잘 못하는 사람. 자칫하면 답답하거나 심지어 지루

한 캐릭터가 될 수 있는데, 마츠다 류헤이가 너무 사랑스럽게 만들어요.

 

특히 카구야에게 사랑에 빠진 후 보여주는 표정 변화가 진짜 좋습니다. 평생 사랑을 안 해봤을 것 같은 남자가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됐을 때 짓는 그 표정. 그걸 마츠다 류헤이가 너무 자연스럽게 표현해요.

그 유명한 연애편지 장면

이 영화에 일본 영화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시퀀스가 있어요.

 

마지메가 카구야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마지메는 사전을 만드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이 편지가 보통 연애편지가 아니에요. 한자가 빽빽하게 가득 찬, 거의 고문서 수준의 편지를 씁니다. 자기가 카구야에게 느끼는 감정을 가장 정확한 단어로 표현하려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예요.

 

카구야가 그 편지를 받고 못 읽어서 친구들과 함께 한자 사전을 찾아가며 해독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게 너무 사랑스럽고 따뜻해요. 보면서 진짜 웃다가 마지막에는 뭉클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가장 정확한 언어로 전하고 싶어하는 한 남자의 진심이 느껴져요.

미야자키 아오이는 진짜 보물

카구야 역의 미야자키 아오이가 이 영화에서 너무 빛나요. 일본 영화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배우 중 한 명인데, 이 영화에서 진짜 그 매력이 살아있습니다.

 

요리사를 꿈꾸는 카구야는 마지메의 어색하고 서투른 구애를 따뜻하게 받아들여요.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의 케미스트리가 진짜 사랑스럽습니다. 화려한 연애 장면이나 격정적인 키스 같은 거 없어요. 그냥 일상에서 천천히 가까워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게 더 마음을 흔들어요.

오다기리 죠도 잊으면 안 됩니다

마지메를 처음 사전편집부로 끌어온 마사시 역의 오다기리 죠. 마지메랑 정반대인 캐릭터예요. 잘생기고 사교적이고 모든 일을 대충대충 처리하려는 직장인.

 

근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 캐릭터에도 변화가 생겨요. 사전 만드는 일을 처음에는 귀찮아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고, 결국에는 그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되는 모습. 오다기리 죠 특유의 멋스러운 연기와 함께 정말 좋은 캐릭터 아크를 보여줍니다.

15년이라는 시간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시간을 다루는 방식이에요.

대도해 사전이 완성되기까지 15년이 걸립니다. 영화는 그 15년을 압축해서 보여줘요. 어떤 동료는 늙어서 은퇴하고, 어떤 동료는 세상을 떠나고, 마지메는 결혼하고, 회사에는 새로운 직원이 오고. 모든 것이 변해가는 와중에 사전 한 권을 만드는 일은 묵묵히 계속됩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한 가지 일을 15년 동안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빠른 결과, 즉각적인 보상,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화려한 순간. 이런 것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이 영화는 다른 속도의 삶을 보여줍니다.

보고 나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15년을 바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 질문 자체가 이 영화가 주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솔직히 단점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영화예요.

 

가장 큰 이유는 정말 잔잔합니다. 큰 사건도, 갈등도, 반전도 없어요. 어떤 분들에게는 너무 지루할 수 있어요. 사전 만드는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영화이기 때문에 액션이나 강렬한 드라마를 기대하시면 실망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 특유의 정서가 있어요. 등장인물들이 감정을 직접 표현하기보다는 절제하고 우회적으로 드러내는데, 이런 스타일에 익숙하지 않으면 답답하게 느낄 수 있어요.

 

133분이라는 길지 않은 러닝타임이지만 처음 보면 좀 길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누구한테 추천하나

  • 잔잔한 일본 영화 좋아하시는 분 → 무조건 추천
  • 한 가지 일을 깊이 파고드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끌리는 분 → 강력 추천
  • 책, 글, 언어를 사랑하시는 분 → 인생 영화 만나실 거예요
  • 화려한 자극에 좀 지치신 분 →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영화
  • 빠른 전개 좋아하시는 분 → 다른 영화 추천드립니다
  • 일본 영화 처음이신 분 → 입문작으로도 좋아요

어디서 볼 수 있나

현재 일부 OTT에서 VOD로 감상 가능하고, 가끔 일본 영화 특별전 같은 데서 상영하기도 합니다.

나중에 같은 원작 소설로 일본 NHK에서 애니메이션도 만들었어요. 영화가 마음에 드셨다면 애니메이션도 강추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가 묻혀있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한국에서는 워낙 화제가 안 됐고, 지금도 잘 회자되지 않거든요. 그런데 정말 좋은 영화입니다. 일본 영화의 가장 좋은 부분 — 잔잔하지만 깊은 정서, 일상의 디테일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 절제된 감정 표현 — 이런 게 다 들어있어요.

 

요즘 같은 빠른 시대에 한 단어, 한 문장, 한 사람을 천천히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귀한지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봄이 끝나가는 5월 어느 밤, 차 한 잔 끓여놓고 혼자 보세요. 마음이 따뜻해질 거예요.

 

영화 보고 나면 사전을 한번 펼쳐보고 싶어집니다.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썼던 단어들을, 다시 한번 음미하고 싶어져요. 그게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입니다.